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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설교제목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본문말씀 이사야 6:1-8 
설교자 황현석 목사 
설교일 2018-05-27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이사야 6:1-8
 
교회력에서는 전통적으로
성령강림주일 다음주일은 삼위일체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지난 주일이 성령강림주일이었으니까 오늘이 바로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주 낯설지는 않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하면
저부터도 선뜻 분명하게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라는 말은
하나님은 한 분이신 동시에 세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할 때
쉬운 예로 드는 것이 우리 사람의 역할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만 해도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역할이 달라집니다.
교회와 집, 직장에서와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저만 해도 교회에서는 목사이지만 집에서는 애들 아버지가 됩니다.
또 부모님에게는 아들이고 허물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저도 나름대로는
이 여러 가지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해서 우리 인간은 누구나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이런 역할을 잘 감당을 해도
동시에 여러 곳에 함께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와 사택이 가깝기는 해도
제가 교회에 있을 때는 집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 여기에 있을 때는 대구 부모님에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교회에 있을 수가 없고
대구 부모님에게 가면 김천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도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한 분이신 하나님은 세 분이시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과는 다르게 여러 곳에서 동시에 사역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기만 했다면
성자 예수의 몸으로 이 땅에 계시던 동안은
하늘은 텅 비어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신 동시에 세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역을 감당하시는 동안에도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저마다 다른 사역을
동시에 행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우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 위에 임하셨습니다.
또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바로 여기에서도 우리는 한 분이시면서 세 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동시에 서로 다른 사역을 펼치시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처럼 임하시고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이 모든 일들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면서 세 분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또 하나님은 세 분이시면서 또 한 분이시기도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세 분이라는 것만 강조해서
한 분이라는 것을 소홀하게 여긴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제각각의 서로 다른 신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세 분의 뜻이 다른 경우도 생길 텐데
그럼 과연 우리는 누구의 뜻을 따라야 될지도 모르고
그만큼 혼란스럽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 분이시면서 한 분이시기 때문에
동시에 서로 다른 사역을 행하시면서도 결코 그 뜻이 다를 수가 없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창조의 사역,
성자 예수께서 펼치시는 구원의 사역,
성령 보혜사께서 펼치시는 인도의 사역은
결코 분열되지 않고 언제나 완전한 일치와 통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일치와 통합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일치와 통합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똑 같아야 한다는 생각부터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치는 결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사역이 함께 어우러져서 일치와 통합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서로 다른 면이 있어도
완전히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참된 통합과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물론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을 해도
하나님이 한 분이면서 세 분이시고,
세 분이면서 한 분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
미심쩍어 하고 제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어떤 지도자(터툴리안)도
삼위일체에 대해서 좀 더 알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태양을 예로 들어서 설명을 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은 분명 둘이나 셋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런데 태양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기도 하고 따뜻한 열이 되기도 합니다.
분명 태양은 하나인데 실제 역할을 보면 셋이고
셋이 서로 다른 역할이지 결국에는 하나입니다.
지금부터 거의 2000년 전에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봐도 얼마나 쉽게 설명을 했습니까?
물론 그 외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많은 설명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밝혀내고 설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걷는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다리가 불편하거나 사고가 난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가 지금 왼발을 띠고 있는지, 른발을 띠고 있는지를 살피면서
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오른발 왼발을 따지면서 걸음을 걷는다면
그 걸음이 얼마나 많은 신경이 쓰이겠습니까?
하지만 두 다리가 건강한 사람은
이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걸을 수 있지 않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명을 통해서 이해를 하고 믿으려고 하면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한 분이시면서 세 분이실 수 있고
세 분이시면서 한 분이실 수 있다고 믿으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니라
놀라운 은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때에 따라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또 성자 예수부터 찾을 때도 있습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보혜사 성령을 먼저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부 하나님을 부를 때도 성자와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십니다.
또 우리가 성자 예수를 찾을 때도 성부와 성령께서 같이 하시고
보혜사 성령을 먼저 찾아도 성부와 성자께서 함께 하십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지 함께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해명하거나 설명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서 말씀은
이사야가 하나님께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먼저 성전에서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계시고
그분의 옷자락은 성소를 덮고 있었습니다.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라고 해서
일종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날개 둘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날개 둘은 발을 가리고 있었고
나머지 두 날개로 날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또 이 찬양소리로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고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을 보면
이사야가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보게 된 시기를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했습니다.
웃시야는 남 왕국의 왕으로서 52년 동안을 나라를 아주 잘 다스렸습니다.
특별히 초창기에는 우상을 멀리하고 하나님만을 공경하면서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행했던 왕입니다.
그래서 웃시야가 다스리던 52년 동안 유다 나라는
정치와 국방에서는 안정을 이루고 경제적으로는 크게 번영해서
그야말로 태평세월을 누렸습니다.
역대기 말씀(역대하 26:22)을 보면
이사야도 하나님께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웃시야 왕의 궁중 서기관이었습니다.
그만큼 이사야도
웃시야 왕을 의지하고 충성하는 마음이 특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웃시야 왕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야도
왕국의 장래와 자기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성전을 찾았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체험한 것입니다.
 
만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웃시야 왕이 죽지 않았으면 이사야가 성전을 찾았겠습니까?
설사 성전을 찾아도 웃시야 왕이 죽지 않았으면
그냥 건성으로 찾지 않았겠습니까?
이사야는 자기가 믿고 의지했던 웃시야 왕이 죽으니까
성전을 그것도 아주 절박한 심령으로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아무 것도 믿고 의지할 것이 없을 때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의 욕심으로는
인간적으로 의지하는 것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도 누리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있을 때는
아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인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다 사라질 때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보면
이사야는 이렇게 특별한 체험을 하고 나서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이사야 6:5).
한마디로 자기가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고
자기가 더불어 살고 있는 남 왕국 백성도 입술이 부정한 백성인데
이런 가운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으니까
이제는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사야 자신과 남 왕국 백성은
정말 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기 전에는,
오늘말씀 대로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전까지는
아마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자기가 좀 더 의로운 모습에 만족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일상생활도 다른 사람들보다 정직하고 깨끗하고
신앙생활 역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신분을 봐도 웃시야 왕의 친척이면서 충성스러운 신하였으니까
어느 누구 못지않은 지위를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사야는 아무것도 부족하거나 아쉬운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나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너무나 추하고 부정한 모습밖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망하게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를 보면
우리가 자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결코 나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거룩하신 하나님부터 먼저 알아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져야 우리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우리 자신만 봐서는 결코 나를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 자신의 추하고 부정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말씀은
이사야가 자기의 부정과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부정을 고백했던 이사야는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있을 수 있었습니까?
오말씀을 보면 이사야가 망했다고 슬퍼하고 회개하고 탄식할 때
스랍 중에 하나가 재단 숯불을 이사야의 입술에 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실제로 7절을 보면 이사야를 가리켜서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회개와 용서가 있었기에
이사야는 부정한 입술을 가진 사람이면서도
하나님께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8절을 보면 하나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당연히 이사야처럼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응답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먼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이 말씀에 응답하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부르지 않으시고 들려주지 않으시면 결코 응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가 자기의 부정한 입술을 고백한 것처럼
우리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아무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싶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회개가 없으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에게 들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이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우리의 부족함과 허물을 고백하는 가운데
용서의 은총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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