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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03/31]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황현석 2019.04.02 10:49 조회 수 : 47

설교제목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본문말씀 누가복음 15:1-10 
설교자 황현석 목사 
설교일 2019-03-31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누가복음 15:1-10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람은 어느 누구 예외 없이 모두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아마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죄인이라고 책망만 하시고 야단만 치시고 손가락질만 하셨다면
여기 있는 우리도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책망만 하시거나 야단만 치지 않으시고
오히려 품어주시고 용납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말씀에는 같은 뜻을 담고 있는 예수의 비유 두 개가 나옵니다.
두 비유 모두 잃었던 것을 다시 찾게 된 기쁨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앞에 나오는 비유는 양 일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린 사람이
온 들판을 헤매다가 그 잃은 양을 찾았을 때
얼마나 기뻐하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뒤에 나오는 비유도 같은 내용입니다.
열 드라크마라는 것은 은으로 된 동전 10개라는 말입니다.
동전 열 개 가운데 한 개를 잃어버린 여주인이
온 집안을 뒤지면서 그것을 찾았을 때
얼마나 기뻐하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이런 비유를 말씀하시게 되었습니까?
1-2절을 보면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서에는 오늘말씀 외에도
‘세리’와 ‘죄인’이 같이 이야기될 때가 많습니다.
세리와 죄인은 한통속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리는 직업입니다.
그러니까 세리는 다른 사람들과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 당시의 세리는 매국노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였고
세리가 거두는 세금은 모두
이스라엘을 정복한 로마를 위해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리는 나름대로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죄인’은 결코 직업이 아닙니다.
또 ‘죄인’이라고 해서 몸에 무슨 표시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죄인과 죄인이 아닌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당시에는 바로 율법이
죄인과 죄인이 아닌 사람을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죄인은 바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말씀을 보면
이런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2절을 보면 예수에 대해서
죄인을 영접해서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수군거렸습니다.
특히 말씀을 보면 그들은 세리와 죄인은 그냥 두고
예수만 비난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왜 세리와 죄인은 그냥 두고 예수만 비난했겠습니까?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들에 대해서는
아예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에게 세리와 죄인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보다 못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수군거리고 비난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런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과 음식까지 함께 드시면서 같이 어울리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을 말 그대로 사랑으로 감싸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로서는
자기들과 정반대로 행동하는 예수가 너무나 보기 싫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예수에 대해서 수군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럼 예수께서는 이들의 수군거림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를 하셨습니까?
오늘말씀에 나오는 두 비유와 그 뒤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까지 포함해서
이 세 가지 비유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수군거림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잃은 동전을 찾은 여인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이런 비유를 통해서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 기쁨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실제로 비유를 보면 대상은 양과 동전과 아들로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양이든지, 동전이든지, 아들이든지
모두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서 기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목자와 여인과 아버지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선 생각할 때는
금전적인 손실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기뻐하는 이유를
이렇게 물량적인 면, 금전적인 면으로만 생각하면
양을 찾은 사람과 은전을 찾은 사람 모두
잔치를 벌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잔치 비용을 생각해 보십시오.
은전 하나는 물론이고 양 한 마리를 잃었을 때보다
몇 갑절의 비용이 들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다시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을 다 떨어 먹은 빈 털털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손해와 이익으로 보면 너무나 큰 손해를 입은 셈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와 여인과 아버지가
양과 동전과 아들을 찾은 기쁨은
물질이나 금전만 가지고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정말 물질과 금전 때문에 기뻐했다면
찾은 다음에도 잔치를 베풀지 말아야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양을 찾고 은전을 찾고 아들이 돌아왔다고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일 정도로 기뻐했습니다.
 
그럼 과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잔치를 벌일 정도로 기뻐했겠습니까?
양을 치는 사람은 온갖 정성을 다해 양을 돌봤을 것입니다.
그런 양을 한 마리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찾지 못했다면 아마 그 양은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 굶주린 이리떼의 먹이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찾았으니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양을 찾은 사람이 기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자기가 정성으로 기르던 양이 굶주림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사나운 이리떼의 먹이가 되는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기뻤던 것입니다.
 
또 은으로 된 동전 한 개도 여주인이 찾지 못했으면
집안 어느 한구석에 처박혀서 녹이 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찾게 되었으니 이런 처지에서 벗어났습니다.
물론 한 드라크마는 가난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까 큰 액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여주인으로서는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해온 동전이었기 때문에
다시 찾은 것을 기뻐했습니다.
 
아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아들은 자기의 잘못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는 아버지 집에 돌아가더라도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 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 못난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무리 못났더라도 아버지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입니다.
오히려 못난 자식일수록 마음이 더 많이 쓰이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또 오늘말씀에 나오는 두 비유에서는
잃어버린 것이 모두 양이고 동전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고 물건입니다.
그런데도 양의 주인은
잃어버려서 어려움과 위기에 빠진 한 마리 양의 형편을 가여워했고
그런 어려움과 위기를 벗어난 것을 기뻐했습니다.
또 여주인은 잃어버려서 녹이 슬고 말았을 동전을
다시 찾게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럼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잃은 양을 찾은 비유 뒤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누가복음 15:7).
또 잃은 동전을 찾았다는 비유 뒤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누가복음 15:10).
바로 이 두 말씀이 두 비유의 목적이요 결론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으로 보면
하나님도 잃은 양을 찾아서 기뻐하는 사람과 같은 분이고
잃은 은전을 찾아서 기뻐하는 여주인과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더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크고 많은 것, 귀하고 소중한 것만이 아니라
작고 하찮은 것도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만이 아니라
죄인 한 사람도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물질이나 금전의 이익과 손해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의인 아흔 아홉과 죄인 한 사람 가운데
당연히 의인 아흔 아홉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쪽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까?
죄인 하나의 회개를 더욱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실제로 예수는 하나님께 너무나도 소중한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 독생자였습니다.
그런 귀한 독생자를 왜 보내시고 죽게 하셨습니까?
바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것도 의인 아흔 아홉이 아니라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위해서!
만일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의인 아흔아홉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께서는 결코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코 구원받은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길 잃은 양이고 잃어버린 동전과 같은 신세였을 것입니다.
여전히 버림받은 존재이고 쓸모없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을 위해서,
바로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 역시 이런 사랑을 본받는 믿음과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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